지난 글에서 어떻게 취업을 운좋게 했는지 공유했었다. 이번 글에서는 4년 조금 넘게 몸담았던 첫 직장에서의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첫번째 직장에서 배우고 잃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신입사원으로 시작해 막 대리로 진급하고 회사를 옮기기까지의 과정에서 배운 것도 많고 잃은 것도 많았다.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첫번째 직장에서 전혀 쓸모가 없더라
정규직이 되고 마케팅 직무를 배정받은 소보로빵은 경역학을 전공했다. 학교를 3년만 다니고 4학년은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하긴 했지만, 어쨌든 3년 간의 경영학 전공 수업을 들으면서 마케팅 수업은 여느 경영학도와 마찬가지로 흥미롭게 들었다. 4P, SWOT와 같은 분석 기법을 동원해 기업의 전략을 짜고 가상의 마케팅 방안을 기획해 보는 것은 꽤나 재밌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성적도 좋았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회사에서 맞닥뜨린 실제 필드의 마케팅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앞서 언급한 4P니 SWOT이니 하는 분석 기법은 딱 2주 간의 오리엔테이션 기간 동안 수행했던 팀별 과제에서나 쓸모가 있었고, 현업에서 선임들과 함께 맡았던 실제 마케팅 방안 수립 업무에서는 활용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이런 분석 기법을 모른 것은 아니었다. 단지, 회사의 비즈니스 상황과 맞지 않았던 것 뿐이다.
“야, 여기서는 그런거 안쓴다. 처음부터 새로 배운다고 생각해.”
첫 직장은 B2B 회사였는데, 일반 사람들을 고객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닌, 기업을 고객으로 유치해야 하는 비즈니스를 전개했다. 하지만 정작 대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배운 것은 모두 B2C였다. 그 어떤 마케팅 원론, 개론 책에서도, 교수님에게도 B2B 마케팅은 배우지 못했다. 대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어줍잖은 마케팅 용어를 사용하다 선임한테 한소리 듣고 나면 다시는 입밖에 그 용어를 꺼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200년대 초반 대학교에서는 B2C 마케팅 기법을 가르치고, B2C 마케팅 사례에 대해 연구했었다. 그리고 소보로빵은, 회사에서 멘땅에 헤딩하며 B2B 마케팅 업무를 몸으로 익혀나갔다.
Excel을 만든 사람은 신이다
회사의 업무는 Excel로 시작해서 Excel로 끝났다. 업무의 80%는 Excel로 처리했다. 나머지 20% 중 15%는 Excel의 내용을 기반으로 PPT를 만들었고, 5%는 Word를 사용해 기안을 썼다.(*기안 : 회사에서 업무 추진 및 비용 사용을 위해 유관 부서 및 경영진의 승인을 받는 문서) 회의에 들어가면 빔프로젝터에 노트북을 연결하고, 스크린에 Excel 화면을 띄워놓고 회의를 진행했다. 화면의 90%는 숫자로 가득찬 표가 차지하고 있고, 가장 오른쪽엔 가로 막대 바가 놓여있었다. 그렇다. 직원 별 영업 실적과 달성률을 막대 그래프로 표현한 표인 것이다.
“알았어, 알겠고. 어쨌든 이번달 마감 맞출 수 있어, 없어?”
회의에서는 복잡한 숫자의 계산 뿐만 아니라 회의록 내용도 Excel에 정리했다. 그 내용을 토대로 내부, 외부 사람과 공유하는 메일에는 Excel의 표를 붙여넣었다. PPT 보고서나 제안서에도, Word 기안에도 Excel로 만든 표가 가득했다. 회사에 출근하고 PC를 켜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메일로 도착한 여러 팀원들(선임들)의 Excel 파일을 열어서 하나로 합치고 정해진 양식에 보기 좋게 정리해 출력해서 팀장님 책상에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 주 월요일 오전 9시 주간회의때에는 다 같이 회의실에 모여 담배를 뻑뻑 펴대며 Excel 창을 멍하니 바라봤고, 팀장님의 호통에 한결같이 고개를 숙여댔다.(간혹 실적을 맞춘 팀원들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렇듯, 회사의 대부분의 업무는 Excel로 처리되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구가 Excel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다른 부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영업팀, 기획팀, 재무/회계팀, 인사팀, 총무팀 할 것 없이 다들 모니터에 Excel이 띄워져있었다. 그리고, 영업팀에 속한 마케팅 선임은 Excel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Excel 고수였다. 복잡한 함수로 얽힌 표와 숫자들, 그리고 매크로가 적용된 시트로 만들어진 Excel 파일이 선임들의 콧대를 더욱 드높여 주는 무기였다. 종종 그 선임이 일 잘하는 직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실제로 다른 직원들의 평가도 비슷했다. 그 선임 없으면 팀 업무가 안돌아 간단다. 왜? 그 선임 만큼 Excel을 잘 다루는 직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Excel이 일을 잘하고 못하는 척도가 된거다.
사람이 싫어도 지식은 남는다
마케팅 업무를 하면서 자연스레 선임의 업무 지원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사람 개인의 매력은 별로였지만(잘난척이 심했다) Excel을 다루는 스킬 만큼은 뛰어났기에 ‘이 사람이 가진 기술 몽땅 다 흡수해야지’하는 마음 가짐으로 업무에 임했다. 그리고, 비즈니스 관계로 만나게 된 다른 외국계 기업의 나이 많은 부장은 이 선임보다 Excel을 더 잘 다루고, 잘난척은 더 심했다. 그래서 마구 면박당하면서도 그 사람이 만든 Excel 파일에 적용된 함수를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이 때 습득한 Excel 스킬은 지금도 요긴하게 써먹는다. 문제는, 소보로빵의 Excel 스킬은 이 때의 수준에서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히자만, 그 이후로도 남들에게 Excel 잘 다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영업팀 선임들이 Excel에서 모르는게 있느면 소보로빵을 찾았으니 충분히 만족한다.
“그 내용이 PPT 어디에 있는 거야? 그래서 얼마를 하겠다는 건데?”
Excel 뿐만 아니라 PPT 스킬도 이 때 많이 배웠다. 마케팅 업무 특성 상 분기, 반기, 연간 보고서를 많이 만드는데, 이 때 어떤 구조로 PPT를 만들어야 하는지, 차트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애니메이션을 과하게 쓰면 왜 윗사람들이 싫어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대학교에서 조별과제 발표를 할 때에는 현란한 애니메이션 효과를 넣고, 큰 타이틀과 이미지를 잘 쓰면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회사에서는 ‘그래서 결론이 뭔데?, 실적이 얼마라는 건데?’라는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보고서에 빼곡히 들어찬 표와 숫자, 그리고 텍스트가 회사에서 통하는 PPT였다.
비록 선임들이 만든 PPT보다 신입사원 소보로빵이 만든 PPT가 보기에는 좋을 지언정, PPT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번의 질문이 필요하다는 것은 윗사람들에게 시간 낭비였다. 그들은 간결함 보다는 하나의 문서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 때 터득한 PPT 작업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PPT를 다루는 스킬보다는, 보고용 PPT와 제안용 PPT가 왜 다르며,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신입사원때 배운 메일 쓰는법, 인사 및 전화받는 예절은 여전히 몸에 베어있다. 명함 건네고 받는 법, 손님 맞이하고 배웅하는 법 등 다른 회사 사람들을 대할 때의 기초 예절, 매너를 참 많이 배우고, 지적당했던 것 같다. 술자리 예절 뿐만 아니라, 담배 타임에서의 예절 역시 이 때 익혔다. 비록 지금은 다 쓰잘데기 없는 것이 되었지만(현재 소보로빵은 술도, 담배도 안한다.) 당시에는 매우 요긴하게 써먹었던, 나를 예의바른 신입사원으로 인식시켜 주었던 소중한 행동들이었다.
과도한 욕심은 적을 만든다
배운 것이 있다면 잃은 것도 있는 법. 일 욕심이 많았던 소보로빵은 누구보다 빨리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진짜 일을 열심히, 무식하게 했다. 야근은 기본이었다. 2008년에 혼자 자취하던 시절, 밤 11시에 퇴근한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다른 선임들에 비할바는 아니었지만, 군 제대 후 급격하게 늘어난 흡연량은 하루 한갑을 너끈하게 넘게 되었다. 그리고 일을 많이 할 수록 아는 것도 늘어났고, 아는게 많아지는 만큼, 보이는 것도 많아졌다. 이게 화근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소보로빵의 첫 직무는 마케팅이었다. 영업팀에 속한 마케팅 담당자 2명 중 1명, 막내였던 것이다. 마케팅 직무는 업무 특성 상 영업팀 직원들보다 더 많은 자료를 들여다본다. 영업팀 실적은 물론이고 마케팅 예산, 마케팅 행사 기획 및 수행 등 회사 내 다른 팀들과 협력할 일이 훨씬 많다. 즉, 다양한 부서의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면서 그들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금씩 직원들에게 일 잘 한다고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게 화근의 시작이었다.
“OO씨, 이리 와봐요. 이거 지난번에 알려줬었잖아요. 벌써 까먹었어요?”
첫 입사 당시 소보로빵은 또래들보다 취업을 일찍 한 편이었다. 그래서 2009년에 같은 팀에 입사한 신입 직원이 나이가 더 많았다. 대한민국 남자는 군대에서 처음으로 나이 어린 상사를 맞이하는 경험을 한다. 이게 그닥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걸 회사에서 또 한다고? 기분이 좋을리 없다. 게다가 소보로빵은 마케팅 담당자이다. 비록 2년차이긴 하지만 제법 아는게 많았다. 거기다 신입 직원들에게 업무를 가르치는 역할도 맡았다. 이러니 기고만장해질 수 밖에.
사원 3년차였나, 당시 사내에 비슷한 나이대의 사원들끼리 모임을 자주 가졌는데, 소보로빵은 거기에 자주 끼질 못했다. 아니 끼질 않았다. 그 시간에 일 하는 것을 택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보로빵 주위에는 항상 선임들 뿐이었다. 대리, 과장, 차장, 부장들과 어울렸다. 내 또래 직원들은 그들끼리 어울렸다. 신입 직원들 무리에서 소보로빵은 자연스레 도태된 것이다. 재수없는 직원으로 찍혔던거다. 그런데 이걸 그때 당시에는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솔직함이 가장 큰 무기다
모처럼 영업1팀과 2팀이 함께 회식을 가졌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간 늦은 시각, 소보로빵은 잔을 들고 선임들 틈을 벗어나 또래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술을 따라주며 ‘OO씨, 회사생활 할만 해요?’ 라며 건방을 떨었다. 겨우 1년차이밖에 안나는 나이 어린 놈이 이렇게 나오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술을 받아든 그 직원은 충격적인 말을 해줬다.
“사실, 저 소보로빵씨 때문에 회사 그만두려고 했어요.”
골이 띵했다. 이유인 즉슨, 내가 너무 갈궈서 그랬다는 거다. 자신은 아직 Excel에 익숙치 않은데 자꾸 소보로빵이 이것도 못하냐면서 대체 몇 번을 알려줘야 하나며 윽박지르는게 싫었단다. 나이 어린놈이 그러니 더 싫었단다. 그래서 자기 동기들끼리 있을 때 내 뒷담화를 많이 깠고, 회사 그만두고 싶은 말을 많이 했단다. 너무 충격이었다. 잠시 할말을 잊은 소보로빵은 자리를 고쳐앉고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 그냥 형이라고 부른다. 나 말 놓을게. 형도 말 편하게 해. 한 잔 받아”
그날 이후로, 회사의 또래들이 소보로빵을 얼마나 재수없게 생각하는지, 싫어하는지 알게됐다. 그동안 동기들끼리, 또래들끼리 어울리지도 않고 선임들 술자리에만 쫓아가며 딸랑대며 일하며 잘난척 해대는 소보로빵이 얼마나 꼴보기 싫었을까 싶다. 그래도 뒤늦게나마 사태를 파악한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그들처럼 처음부터 영업 직무를 맡았더라면 하나씩 차근차근 배우며 성장했을텐데, 마케팅 직무를 맡으면서 접하는 정보의 양이 많았고, 자연스레 생긴 일 욕심을 너무 과하게 폭발시킨 나머지 주변을 너무 멀리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소보로빵 주변에서 든든한 힘이 되어 줄 동기들, 또래들은 없었다.
그래도, 이제 그냥 형이라고 부를테니 말 놓으라는 소보로빵의 진지한 마음이 통했나보다. OO형은 그날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본인이 섭섭했던 것들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그 말을 다 듣고, 소보로빵은 그 형에게 내가 얼마나 건방지게 굴었는지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 사건 이후 소보로빵은 신입 직원들을 좀 더 유하게 대하려 노력했고, 동기들과 친밀하게 지내기 위해 먼저 다가갔다. 그 결과, 내 사과를 받아준 형과는 여전히 서로 다른 회사에서 반갑게 연락을 주고 받는 몇 안되는 첫 직장 동료가 되었다. 소보로빵의 직장생활 인간관계에 대한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OO형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낀다.
그렇게 4년이 지나고, 본부가 사라졌다
일에만 미쳐있었던 입사 초기 2년, 그리고 나서 겪은 일들을 통해 조금 여유를 찾은 소보로빵은 이전보다 더 즐겁게 동료들과 일할 수 있었다. 그런데 회사 사정이 별로 좋지 못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결국, 경쟁사에 밀려 업계에서 점유율을 조금씩 잃어갔고, 한달여 간 열심히 준비한 제안 PPT에도 불구하고 우리 회사는 사업권을 뺏기고 말았다. 그리고 회사는 그 사업을 오랫도안 진행해왔던 우리 본부를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본부 해체 결정이 내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영업팀 직원들이 사표를 썼다. 경쟁사로 이직을 한 것이다. 사실 하루아침에 사업권을 뺏긴게 아니고, 꾸준히 조짐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눈치 빠른 영업 직원들은 물밑에서 이직 준비를 하고 있었고, 확정된 이후 미련없이 사표를 던진거다. 회사에 소위 충성을 바쳤던 소보로빵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제라도 이직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출근하면 이력설를 다듬고 취업포탈을 들락날락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물론, 경쟁사에서 오라고 꼬시기도 했지만, 가지 않았다. 뭔가 급을 낮춰서 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업계 평판도 실제로 그랬다.
“우리팀 와서 일 해볼래? 마침 우리도 너같은 마케터가 필요하거든”
다행히 다른 본부의 영업팀에서 소보로빵에게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줬다. 비즈니스 분야만 다를 뿐, 하는 일은 비슷한 팀이었다. 그 동안의 경험을 살려 바로 실무에 투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경쟁사에 가면 4년동안 해왔던 일을 다른 회사에 가서 그대로 하게 되는 것이었고, 다른 팀으로 가면 새로운 제품을 취급해야 했지만 어차피 자주 보던 사람들이고 같은 회사이기에 부담이 덜했다. 그러던 찰나에,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당시 우리 회사보다 규모가 좀 더 큰, 그룹의 맏형과 같은 계열사에서 면접을 보자고 했다.
아무튼, 본부가 사라지고 소보로빵은 경쟁사로의 이직, 기존 회사의 다른 팀으로 이동, 계열사 전보 이 세 개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결론이 어떻게 났냐고? 다음 글에서 이야기 보따리를 마저 풀어보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