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글에서 4년간 몸담았던 본부가 사라지게 됐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팀의 많은 영업직원들은 경쟁사로 이직했는데, 소보로빵도 마찬가지의 기회가 있었지만 선택하지 않았다.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더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본부의 사업권이 날아가고 조직 개편까지 남은 시간은 2개월 남짓. 이 기간동안 결정해야 했다. 지난 글 말미에, 다른 제품을 취급하던 타 본부의 영업팀에서 마케팅 직무로 제안이 왔었다고 했었다. 제안을 해주신 팀장님께 저를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총 3번의 면접을 보고, 첫번째 이직에 성공했는데,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던 시기가 있었다
본의아니게 이직을 준비해야 했던 시기가 되었지만, 당시 소보로빵은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당시 회사 내부적으로도 일 잘한다고 인정받고 있었고, 경쟁사에서도 스카웃 제의가 왔기 때문이다.(하지만 경쟁사는 당시 다니던 회사보다 규모도, 조건도 좋은 면이 없었기에 최종적으로 제의를 고사했다.) 간판 때고 붙으면 또래의 어떤 사람과 붙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취업포탈에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헤드헌터 풀에도 등록했다. 이후, 헤드헌터로부터 몇 건의 제의를 받았고, 서류를 접수했다.
그 결과, 우리 회사와 비슷한 업계에 있지만 훨씬 규모가 더 대기업 계열사, 그리고 다른 업계이지만 업무는 비슷했던, 당시 네비게이션 제조사로 명성을 떨치던 중견기업의 마케팅 직무 면접 기회가 잡혔다. 그리고, 같은 업계에서 분야가 다르지만 하는 일은 비슷했던, 좀 더 큰 규모의 그룹사 IT 기업의 면접 기회도 얻었다.
“솔직히 말해서, 말씀하신 성과가 그렇게 대단한 것 같지는 않네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대기업 계열사 면접은 1차 통과 후 2차 임원 면접에서 탈락했고, 네비게이션 제조사 면접은 실무 면접의 벽을 넘지 못했다. 두 기업 모두 소보로빵의 경험을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은 것이 주된 이유였다. 소보로빵은 B2B 비즈니스 분야에 몸담긴 했지만, 직접 고객을 발굴하는 것 보다는 채널 관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개인의 역량 보다는 회사의 간판 덕분에 거둔 성과였다. 그 점을 면접관들이 제대로 간파한 것이다. 이 때 첫 좌절을 겪었다.
그 다음, 동종업계의 면접은 무난하게 통과했다. 인사팀으로부터 입사 조건까지 전달받고 건강검진까지 받았지만 마지막에 고사했다. 한 번의 좌절을 겪고 나니 자신감이 떨어져 새로운 환경에서의 생활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이 생긴 것이리라. 결정적으로 연봉인상폭이 적은 것도 주효했다. 그래서 소보로빵은 다시는 그 회사에 입사할 수 없게끔 그 회사 인사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이로써 3번의 면접기회를 날리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회사 내 다른 영업팀의 마케팅 직무로 같은 회사에 남는 것이었다.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2번의 면접에서 광탈하고 실의에 빠진 채 이력서를 끄적이며 시간을 때우고 있는 날이 늘어만 갔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것이, 본부가 해체되고 많은 인력들은 이미 경쟁사로 출근하기 시작했으며, 사수마저 경쟁사로 이직을 결정해서 팀 내에 남아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영업팀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긴 했지만,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채 계속 이직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이후 헤드헌터로부터 매력적인 제안을 받지 못했었다. 나 없으면 회사가 안돌아갈 것 같았는데, 회사는 잘만 굴러갔다. 자신감이 점점 사라지는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계열사 마케팅팀 팀장님께서 한번 보자고 하셔요. 시간 괜찮아요?”
인사팀에서 잠깐 보자고 하더니, 계열사 마케팅팀의 팀장님이 한번 보자고 하신다고 알려왔다. 그 계열사는 아랫층 건물에 입주에 있었는데, 말이 계열사지 그룹사 중 첫 번째로 설립된 회사로, 사실상 그룹의 모태가 되는 회사였다. 비즈니스 분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취급하는 제품이 다르고, 제품의 수도 많았고, 결정적으로 제품이 가지는 가치가 달랐다. 첫 회사의 제품은 말 그대로 ‘제품’이었지만, 계열사가 취급하는 제품은 ‘솔루션’ 성격이 강했다. 기업에서 비용을 지불해 직원수에 맞게 구매해서 설치하고 사용하는 것이 제품이라면, 솔루션은 기업의 처한 어려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수단이다. 그래서 컨설팅이 필요하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함께 납품되며, 바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고객의 환경에 맞게 구축되고, 검수 과정을 거친다. 결과적으로, 계열사의 비즈니스가 좀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분야였다.
인사팀에 알겠다고 의사를 전달한 뒤 간단히 계열사 비즈니스에 대해 조사해 봤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완전히 새로운 분야였기 때문에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제품에 대해, 솔루션에 대해 모르는 것은 배우면 그만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원한 것은 마케팅적 역량이었기 때문에 없는 자신감을 긁어모아 면접을 보러 회의실로 갔다. 그런데, 마케팅팀 팀장님과 더불어, 마케팅팀을 관리하는 본부의 본부장님, 임원도 있었다. 아차 싶었지만,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무와 임원 면접을 동시에 보는 것이지 않나.
첫번째 이직, 역시 운이 강하게 작용했다.
면접은 차분히 진행됐다. 질문도 무난하게 답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팀장님과 본부장님은 내 업무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고, 본인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소보로빵도 알고 있는지 점검하는 듯한 질문이 이어졌다. 같은 업계 사람들에게 받는 질문이라 소보로빵의 답변도 막힘이 없었다. 답이 술술 나오니 자신감도 슬슬 올라왔다. 몇 가지 용어가 낯설어서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팀장님은 그런건 차차 익숙해 질 거라며 괜찮다고 했다. 면접은 무난하게 끝났다.
“1월부터 계열사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전보 처리가 될거예요.”
면접을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다. 1월부터 계열사로 출근하란다. 첫 이직이 성공한 순간이었다. 아니, 이것도 이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계열사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퇴사 후 입사가 아닌 전보로 처리된다고 했다. 그래서 근속연수가 이어짐은 물론, 직급도 유지되고 경력도 그대로 인정된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계열사의 처우 조건이 좀 더 좋았기에 연봉이 살짝 올랐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어찌됐든 첫 이직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해가 바뀌고, 첫 출근 자리에서 팀장님과 면담을 했는데, 어떻게 입사하게 된 것인지 연유를 알게 됐다. 당시 계열사의 마케팅팀에 결원이 생기게 되었고, 그 직원이 담당하던 솔루션이 꽤 중요한 것들이어서 당장 업무에 투입할 인력이 급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동종 업계의 동종 업무를 해 본 경험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마침 비즈니스 권한이 날라가 갈 곳을 잃은 내가 적임자로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두 계열사 임원과 팀장, 인사팀에서 사전 조사를 마치고, 최종 점검 차 나를 불러 면접을 본 것이었다. 소보로빵이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무조건 성사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정말 운이 좋았던 순간이었다.
내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2007년에 입사 후 2012년까지 있었던 첫 회사에서는 신입으로써의 자세와 예절, 그리고 동료들과의 인간관계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면, 2012년에 옮긴 계열사에서는 본격적으로 일로써 소보로빵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연히 승진에서 도태될 것이고, 그저 그런 직원으로 연차만 채우다가 무기력하게 퇴사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당시 회사에서 40대 중반 이후 임원을 달지 못한 직원은 대부분 남아있질 못했다. 회사의 압박에 못이겨 퇴사를 당하거나 한직으로 발령나 스스로 그만두는 일이 허다했다. 정말 치열하게 노력하고 성과를 내지 못하면 소보로빵의 정년은 길어야 40대 중반이었다. 당시 말련 부장의 나이가 그 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었고, 그 밑거름으로 내 자신의 가치를 점점 증명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새로운 기회들이 찾아왔고, 남들과 다른 뜻깊은 경험치를 오롯이 채워나갈 수 있었다. 다음 글에서는, 소보로빵의 두 번째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과 또 다시 찾아온 기회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아쉽게도 해피엔딩은 아니다.
끝!